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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정공>선무랑훈동원봉사공휘종원묘갈명(宣務郎訓錬院奉事公諱宗元墓碣銘)
宣務郎訓錬院奉事公諱宗元墓碣銘 宣廟龍蛇之役有奮忠敵愾未遂裏革之志不幸中途而歿者故奉事公諱宗元字而善是己公膂力邁倫倜儻有氣節蔭補内禁衛敍訓鍊院奉事階宣務郎及當壬辰聞大駕西幸都城失守悲憤不自勝就宗黨前府使挺前縣監孝元決糾義勤王計約束列郡軍餉戎械略有措備與前僉正姜恬等七十餘人赴潭陽募義所霽峯高公見而壯之方整旅北上推公爲前軍守禦將及至全州軍聲大振進次礪山時賊自黃澗踰錦山盖欲蹂躪全州也公語主將曰完府是湖南根本且眞殿奉御所重尤別主將然其言遂班師據全州將設備於鎭安長水界以遏前路公與高準峯從厚聽軍制以前適當絶峽遇覘賊數騎公揮劎嘶殺餘賊退縮不敢近一軍增氯七月移兵珍山將擊錦山之賊公病臥珍山不能進既而土城之役諸公相繼戰歿公聞之驚恫恨不得同日死得其所亦有數存焉自是憂憤疾篤輿還舊居以十月二十七日卒臨終泣謂家人曰不能殉國自盡牖下是吾恨也姑爲藁殯待聖上回鑾而葬也亂己錄宣武原從勳墓在斗旨洞寅坐原從先兆也公淳昌人以高麗檢校侍中璋爲上祖冠冕相襲世有偉人恭譲時有玉川府院君號農隱諡忠獻公諱元吉功存宗社名齊圃牧諱瑜號虔谷官副正入杜門洞守罔僕義是生節愍公諱崇文節愍生敎官諱哲山 光廟丙子父子殉六臣禍並三世棹楔而爼豆之是其高祖以上曰瓊曰昌門俱不仕曰愷朝家錄用除寝郎即公曾祖祖禰也妣高山高氏配宜人海州鄭氏忠傑女二男蓂 贈軍資監正次莢一女適晋州姜爀蓂男允纘 贈參議允瞻 贈軍資監正女適光山金勛允甫允福側出也莢男允慶允憲女適崔定邦鄭英遠河魏寶宋應奎李秀篁曾孫夏亨武郡守必亨濟亨致亨 贈參判錫亨鼎亨益亨 贈參議信亨武科順亨重亨邦亨餘不盡記嗚呼忠君報國臣子之職分也然當危難之際雖高官重祿鮮或不爲全軀保妻子之計而公則一命疎逖之蹤耳乃挺身赴難衛冒矢石志決身殲不負世篤忠貞之節何其偉也若其不死於鋒鏑之間者天也豈可與立殘諸公有所差殊觀哉移孝爲忠如是則平日内行之甚篤推可驗也今其世代遙遠文獻疎略嶽降月日筮仕年紀無得以詳而惟擧義樹勳之蹟昭載於公私文字天之不朽公者豈偶然乎哉但三百餘年之久而墓尚無刻後孫秉祐秉文秉贇蕓燮等爲是之懼方竪石阡道以公旁裔寅錫所述狀屬余爲銘感古傷今何敢以病廢辭請文者胄燮寅燮也銘曰仡仡趙公萬夫之特臨難奮義志在殉國生死何殊事光竹帛猶有茹恨未遂裏革斗洞之峙昭揭牲石有來千秋過者必式 月城 崔永祚 撰 선무랑훈련원봉사공휘종원묘갈명(宣務郎訓鍊院奉事公諱宗元墓碣銘) 선조(宣祖) 임진왜란 때 충용을 뽐내며 적대할 의분을 가지고도 시체를 가죽에 쌀 뜻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중도에서 죽은 사람은 고(故) 봉사공 휘 종원(宗元) 자 이선(而善)이다. 공은 힘이 절륜하고 굳세고 기개와 절조가 있어 음보(蔭補)로 내금위(内禁衛)가 되 어 훈련원 봉사에 임명되었는데 품계는 선무랑이었다. 임진년에 임금의 행차가 의주로 몽진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일가인 전 부사(府使) 정(挺)과 전 현감인 효원(孝元)과 함께 왕을 위하여 싸울 것을 계획하고는 여러 군(郡)과 약속해 군량과 무기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전 첨정 강염(姜恬) 등 七十명과 담양(潭陽)에 있는 의병 모집소에 나갔다. 제보(霽峯) 고경명(高敬命)이 이를 장하게 여겨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면서 공을 전군수어장(前軍守禦將)으로 임명하였다. 전주에 이르러 군사의 형세가 크게 떨쳐 여산(礪山)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이때 적병은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사(錦山)을 넘어 전주를 짓밟으려했다. 공은 주장에게 말하기를, 『전주는 호남지방의 근본이며 또 왕의 영정이 보관된 곳이니 더욱 중요한 곳입니다.』 하니, 주장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전주의 군사를 주둔하여 장차 진안과 장수의 경계에 병기를 설치하여 적의 앞길을 막으려 하였다. 공은 준봉(準峯)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명령대로 전군을 맡았는데 마침 외진 골짜기에서 적의 기병 몇 명이 있는 것을 보았다. 공은 칼을 뽑아 그 적을 죽이자 남은 적들은 도망하여 감히 가까이 덤비지 못하니, 아군의 사기가 높아졌다. 七월에는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장차 금산의 적을 치려고 하였는데 공은 병이 나서 진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얼마 후 토성(土城)싸움에서 여러 사람이 잇달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며, 『죽을 장소에서 죽는 것도 운명이구나.』 하고는 이때부터 울분 때문에 병이 더욱 악화되어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와 十월 二十七일 세상을 떴다. 임종할 때 집안사람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하고 방에서 죽는 것이 내 한이다. 그러니 우선 거적에다 빈 (殯)하였다 임금께서 서울로 돌아오거든 장사 지내거라.』 하였다. 난리가 끝나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기록되었으며 묘는 두지동(斗旨洞) 인좌(寅坐) 언덕이니, 선영이 있는 곳이다. 공은 순창인으로 고려 검교시중 장(璋)을 시조로 한다. 벼슬이 이어져 오다. 그중 훌륭한 사람은 공양왕 때 옥천부원군 농은은 시호가 충헌공(忠獻公)이며 휘가 원길(元 吉)이다. 나라에 공을 세웠으며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과 이름이 나란했다. 휘 유(瑜)는 호가 건곡 벼슬이 부정으로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는데 그분이 절민공 휘 숭문(崇文)을 낳았다. 절민공이 교관 휘 철산을 낳았는데 세조(世祖) 병자년에 사육신과 함께 부자가 같이 죽어 삼세(三世)의 정문을 내려 제사한다. 이상이 공의 고조(高祖) 이상이다. 경(瓊)과 창문(昌門)은 벼슬하지 않았고 개(愷)는 나라에서 참봉으로 뽑았으니 이분 들이 바로 공의 증조·조·고(考)이다 비는 고산고씨(高山高氏)이며 배 의인(宜人)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충걸(忠傑)의 딸이다. 二남을 두었는데 명(蓂)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고 차남은 협(莢)이다. 딸은 진주(晋州) 강혁(姜爀)에게 출가하였다. 명의 아들 윤찬(允纘)은 참의에 추증되었고 윤첨(允瞻)은 군자감정에 추증되었으며, 딸은 광 산(光山) 김훈(金勛)에게 출가하였다. 윤보(允甫)·윤복(允福)은 서출이다. 협의 아들은 윤경(允慶)·윤헌(允憲)이며 딸은 최정방(崔定邦)·정영원(鄭英遠)·하위 보(河魏寶)·송응규(宋應奎)·이수황(李秀篁)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증손은 하형(夏亨)·무(武) 군수(郡守)·필형(必亨)·제형(濟亨)·치형(致亨)·증참판(贈參判) 석형(錫亨)·정형(鼎亨)·익형(益亨)·증참의(贈參議) 신형(信亨) 무과에 급제하고 순형(順亨)·중형(重亨)·방형(邦亨)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신하의 본분이다. 그러나 위험한 때를 당하여는 비록 많은 녹을 받는 고관들도 자신의 목숨과 처자들을 위한 계책을 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그런데 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적을 막아 대대로 충성과 절의를 지켜 온 조상들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가 적에게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의 명이니 어찌 싸우다 적에게 죽은 여러 사람과 다르게 보겠는가? 효도를 옮겨 충성하였으니 평소 행실이 매우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세대가 멀어 문헌이 소략하여 생년월일과 벼슬한 연대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의병을 일으켜 공훈을 세운 자취만이 공사 문자 가운데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러니 하늘이 공을 썩지 않게 함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다만 三백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비석이 없어 후손 병우(秉祐)·병문(秉文)·병윤(秉贇)·운섭(蕓燮) 등이 이름 염려하여 바야흐로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공의 방손 인석(寅錫)이 쓴 행장을 나에게 보내 명을 청한다. 옛일에 감동하고 지음 일이 슬프므로 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지 못한다. 글을 청한 사람은 주섭(胄燮)·인섭(寅燮)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뚝한 조공은 仡仡趙公 만 명 무리 가운데 뛰어나네. 萬夫之特 난리 당하여 의분 일으켜 臨難奮義 나라 위해 죽으려 했네 志在殉國 죽고 사는 것 무엇이 다르랴 生死何殊 사적이 역사에 빛나네 事載竹帛 그래도 한스러운 건 猶有茹恨 싸움터에서 죽지 못한 것 未遂裏革 두지동 언덕에 斗洞之峙 환한 비석이 昭揭牲石 천년까지 빛나리니 有來千秋 지나는 자는 공경하라 過者必式 월성 최영조(崔永祚) 지음 註:※최영조(崔永祚):본관은 경주(慶州)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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